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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게조인을 체험한다

1.본당

현재의 본당은, 덴포 연간의 화재 후, 사나다 가문의 원조로 재건된 것입니다. 전후·좌우·상하가 두꺼운 토벽인 육방장이라고 불리는 드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본당 내진의 감실에는 비불의 본존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습니다.
비불이어서 감실 문은 닫혀 있습니다만, 이 문에도 범어 ‘흐리히(아미타불)’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본당에는 사나다 마사유키 공이 생전에 본인이 건립한 위패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山門

2.산문

참배자를 맞이하는 산문에는, 사나다 가문의 문장 육문전이 그려진 제등이 긴 장대에 내걸리고, 1860년(에도시대 만엔 원년)에 사나다 가문의 원조로 재건된 증거로 ‘만엔 원년의 동찰’이 박혀져 있습니다.
또, 외담에는 또 다른 가문 문장, ‘안금(기러기)’을 볼 수 있습니다.

3.표정 정원 양식과 흐리히(아미타불)문자

앞뜰의 정원 양식은 가마쿠라 시대 후기(14세기)에 확립된 고산수 양식입니다.

고산수는 돌, 모래, 초목으로 연못과 강의 흐름을 표현하며 불교적 세계관, 우주관,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냅니다.

이 앞 정원에 그려진 ‘사문’은 범어인 ‘흐리히’라는 한 글자입니다.


범어란 고대 인도에서 사용된 산스크리트어로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홍법대사 구카이가 범어를 바탕으로 일본어의 알파벳을 가다듬었다고 일컬어집니다.

그려져 있는 ‘흐리히’는 연꽃과 그 위에서 선정에 들어가는 아미타여래를 나타내고 있고, 경내에 발을 디디면 본당에 모셔져 있는 비불 본존 아미타여래를 똑바로 가리키고, 아미타여래와 기도하는 참배자를 잇는 영선인 듯싶습니다.

4.중원

덴포 시대의 화재에서도 불타지 않고 지금도 살아있는 단풍나무와 수령 500년을 넘는 소나무가 있는 안 뜰.
사나다 부자도 바라보았을 이 정원에서는 전국 시대부터 흘러온 시간과 산의 절답게 자연의 변화도 느낄 수 있습니다.

5.상단의 방

사나다 마사유키가 앉은 상단의 방에 비치된 구리(절부엌)은 에도기의 화재로 한 번 소실되었지만, 1860년(에도시대 만엔 원년)에 같은 장소에 같은 규모・같은 형식으로 재건되었습니다. 당시의 모습을 그리어볼 수 있습니다.

6.사나다 가문 묘소

당원의 안쪽에 조영된 노부시게의 형, 노부유키 공과 그 자식·노부마사 공과 가족의 석탑입니다.
시부유키의 ‘행(유키)’은 이에야스를 거스른 친부 마사유키의 ‘행’ 자를 계승하고 있기에, 나중에 ‘지’ 자로 바꾸었습니다만, 석탑에는 ‘신행(노부유키)’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당원에 사나다 가문의 영대 공양료로서 당시 1천 량을 바치고 묘소 앞에는 위패당이 있었습니다만, 다이쇼기에 소실되어 버립니다.

이 위패당에 모신 친부 마사유키 공이 생전에 자신이 만든 위패 등은 현재 본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7.호마당

호마의 불꽃으로 번뇌를 불사르고 심신의 건전과 가족의 평안을 기도하는 호마당.
이 호마당에는 예전 주직이 꿈으로 감득했다고 전해지는 부동명왕 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동명왕의 모습은 왼손은 견삭이라는 앞에 분동이 붙은 오색의 포승줄을 가지고, 오른손에 보검을 들고 있습니다만, 당원의 부동명왕은 오른손에 독거저를 가지고 있는 특이한 불상입니다.

8.사보

- 사나다 노부시게 공 자필 편지

구도야마에서 살았던 노부시게 공은
고야산 지주의 신, 니우묘진의 대축제 초대를 렌게조닌의 주직으로부터 받습니다만, ‘배가 아파서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이 이 편지에 쓰여 있습니다.

문서의 마지막에 있는 화압이라는 사인에 해당하는 인이 찍혀있는 것에서 노부시게(유키무라) 본인이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나다 노부시게 공 자필 ‘소주 서장’

노부시게 공은 술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야산에서 칩거했을 때는 신슈마쓰시로번 번주였던 형 노부유키 공의 원조에 의지했었던 것 같습니다.


노부유키 공의 가신, 가와하라 사쿄에 보낸 내용은, ‘항아리에 가득히 소주를 부어 가져오길 바란다. 쏟아지지 않도록 확실히 봉을 하여 운반하길 바란다’ 등이 쓰여 있습니다.

이 서장에도 화압이 찍혀있는 것에서 노부시게(유키무라) 본인이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고야산에서 득도를 받아 수여된 승명 ‘호백(고하쿠)’이 적혀 있는 귀중한 서장입니다.

- 사나다 마사유키의 ‘숙방 계약서’

당시는 좋아하는 숙방을 선택할 수 없었고, 지방이나 번마다 할당되었습니다.
렌게조인에 신슈(지이사가타군·사구군·미노치군·사라시나군·하니시나군) 지방분들이 묵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우에다 영주였던 사나다 마사유키 공과 숙방 계약을 맺고 있었던 까닭으로 이것은 그 계약서입니다.

- 남반 투구(고야산 영보관 소장)

노부시게가 전장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투구가 남아 있어, 그 귀중한 가치로 현재는 고야산 영보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사나다 가문이라고 하면 붉은 갑옷, 붉은 투구가 유명하고, 투구에는 사슴의 뿔이 있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만, 너무 눈에 띄는 것과 뿔이 방해되어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소박한 갑옷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 도검 ‘명 구니히로/고잔쇼닌 기진’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당원에 도검을 기진한 고잔쇼닌은 고야산에 입산할 때,
나무 열매 이외는 먹지 않는 수행을 한 것에서 목식응기, 모쿠지키오고라는 칭호로 불렸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야 공격 때에는, 고야산을 대표하여 평화 교섭을 하여, 히데요시의 신망과 인정을 얻습니다. 후에 히데요시 정권의 중추에 참가했습니다.

현재의 곤고부지절이라 칭하는 건물은, 히데요시가 오고를 주직으로 하여, 모친의 보제를 위해서 세운 세이간지절을 개칭한 것입니다.

구니히로라는 인물은 교토 호리카와에 거주한 당대 제일의 도공으로 호리카와 구니히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검은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습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상

사나다 마사유키가 히데요시로부터 배령한 것으로, 그림 왼쪽 상단 모퉁이에 마사유키 자신의 서명을 볼 수 있습니다.
히데요시 자신이 인정한 자화상이며, 후대의 히데요시상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 사나다보의 책

히로마(큰 방)에는 사나다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1942년(쇼와 17년)에 당시의 사나다 가문 당주가 보낸 것으로, 전국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당원과의 인연이 계속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당원에서는 이 책도 후세에 남겨야 할 귀중한 사보의 하나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