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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게조인을 안다

렌게조인에서 보는 잇신인 계곡

고야산은 단상가람, 오쿠노인과 ‘고야줏타니’라고 불리는 10개의 계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야줏타니’에는, 계곡의 이름이 되는 사원을 중심으로, 선사(죽은 스승)나 단오쓰(재물을 베푸는 신자)를 공양하는 무덤이나, 많은 자원(본 절에 부속하는 작은 절)이 세워졌습니다.

각각의 계곡은, 원내당(예배 시설) ・유야(욕탕)등의 공용 시설을 가지고, 계곡의 스님들이 공동으로 행사를 행했던 것에서, 마을로서의 조직이 있었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고야줏타니’의 하나, 고야산 내의 북서부에 있던 것이 ‘잇신인 계곡’입니다.

잇신인 계곡은 요시노의 쇼노이와야(생황의 굴)에서 엄격한 수행을 쌓고, 불교, 신도에 정통한 교쇼쇼닌이 창건한 잇신인 절 주변 그 자체를 영역으로 한 계곡입니다. 쇼노이와야는 현재의 나라현 가미키타야마 촌에 있는 수행의 영지입니다.

잇신인은, 도바 상황의 제3 황녀인 하치조인 아키코 내친왕 및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귀의한 사원으로 문헌에 남아 있습니다.

교쇼쇼닌(1130-1217)은 관백 구조 도가에 ‘생불’(현세에 살아있는 부처)이라고 상찬받던 고승입니다. 54세까지 고야산을 등산하고, 88세의 장수를 누렸습니다

기일은 5월 7일입니다. 또한 이후의 설명에 나
는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의 기일도 같은 5월 7일입니다.

교쇼쇼닌은, 제자였던 요리토모의 3남, 조교쇼닌에게 잇신인을 양도했습니다.

조교쇼닌(1186-1231)은, 가마쿠라 막부의 장군도 될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였으나, 생애를 불도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그덕분에 요리토모의 남자 중에서, 오직 홀로 천수를 다할 수 있었습니다.

에도 시대까지 잇신인은 폐절하였기에 현재의 잇신인 계곡에 잇신인 그 자체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단상가람 내에 이축된 국보 부동당(14세기 초에 재건된 것)은, 원래 잇신인의 본당이었습니다.

운케이가 만든 유명한 국보 팔대동자 입상은 이 부동당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 군입니다.

이렇게 역사 깊은 잇신인 계곡 내에 교쇼쇼닌이 많은 자원을 개창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본존이 아미타여래였던 오쿠노보(원호는 염불원)가, 현재의 렌게조인이 되었습니다.

교쇼쇼닌은 이 자원에서, 일심으로 아미타 여래의 명호를 외는 수행인 염불 삼매의 생활을 보냈다고 합니다.

렌게조인은 잇신인 계곡의 서북부에 있습니다.
교오사카미치에서 후도자카를 경유하여 후도자카구치(교구치)에 다다라, 거기에서 뇨닌도사카를 내려간 곳에 있습니다.

교오사카미치는 ‘고야 나나쿠치(고야산에 들어가는 7개의 길)’의 하나로, 에도시대, 교토・오사카에서 고야산에 오르는 최단 코스였습니다.

1838(덴포 9) 년 간행의 “기노쿠니 명소 도회”에, 이 길로 등배하는 것이 10에 8아니면 9다’라며 에도시대에 가장 이용되었던 가도였습니다.

835(조와 2)년, 홍법대사 구카이가 영원한 명상에 들어간 ‘입정’ 후에, 사람들 사이에 점차로 ‘입정 신앙’이 퍼져 갔습니다.

‘입정 신앙’이란, 홍법 대사(영적인 존재)가 지금도 고야산 오쿠노인의 묘내에 생신(이키미)인 채로 있으며, 56억 7천만년 후에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할 때까지 사람들을 계속 구제하고 있다는 신앙입니다.

렌게조인 옆의 뇨닌도구치를 오른 곳이 후도자카구치(교구치). 그곳에 1000년 이상 이어진 여성 금제 결계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잇신인 계곡으로, 결계의 바깥쪽에는 여성을 위한 ‘고모리당’이 세워졌습니다.
이 고모리당이 후에 ‘뇨닌도(여인당)’이 되었습니다. 고야산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여인당입니다.

2004(헤이세이 16)년에 고야산 시치구치의 하나, 초이시미치가, ‘기이 산지의 영장과 참배도’로서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된 것에 이어,
교오사카미치 중에서 이로하자카(구 후도자카)에서 뇨닌도까지의 산길이 2016(헤이세이 28)년 10월에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렌게조인을 안다

1521년(다이에이 원년), 고야산은 4,000개 절이 소실되는 화재에 휩쓸립니다. 이듬해 당원은 신슈나가노의 호족과 숙방 계약을 맺어 재건을 진척시켰습니다. 이때 사나다 가문의 시조에 해당하는 운노 씨를 만났던 것도 신비한 인연입니다.

1600년(게이초 5년) 9월, 후에 260년 이어지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도요토미 가문의 존속을 바라는 서군이 사투를 펼친 천하를 두고 싸운 전쟁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싸움에서 서군은 패하여, 서군 편이었던 시나노쿠니, 현재의 나가노현 우에다의 영주 사나다 마사유키와 차남의 노부시게는 고야산에 칩거하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그때 사나다 부자가 선조 이래의 숙방으로 임시 거처한 절이 렌게조인입니다.

그러나, 고야산은 여인금제. 한동안 당원에서 임시 거처를 하던 사나다부자에게, 당원은 산기슭의 구도야마에 주거를 준비하여 가족이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노부시게의 구도야마와 당원을 왕래하는 생활은 14년에 걸쳐 이어지고, 득도한 노부시게에게는 ‘고하쿠(호백)’의 승명이 주어졌습니다.
1614년(게이초 19년) 11월.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가독을 이은 3남의 히데요리를 위협이라 생각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비우지 않는 히데요리에게 싸움을 겁니다. 이것이 ‘오사카 겨울전투’입니다. 도요토미 가문에 충의를 나타내는 노부시게(유키무라)는 구도산을 빠져나와 오사카성의 남쪽으로 출성하여 ‘사나다마루’를 구축하고 용맹하게 응전하여 승리합니다만,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노부시게는 마침내 힘이 다하여 전사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친부, 마사유키의 교묘한 책략으로 도쿠가와 쪽을 편든 형, 노부유키가 사나다의 가독을 계승하여 사나다 가문의 멸문은 면했습니다.

노부유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의 충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그리고 사나다 가문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부친 마사유키의 이름에서 딴 한 글자 ‘행’를 ‘지’로 개명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원은 사나다 가문의 숙방으로서 노부유키와 계약을 갱신하고, 이후, 사나다 가문의 고야산에 있는 보리사로서 ‘사나다보’라고 불리게 되고, 사나다 가문 문장인 ‘6문전’과 ‘안금(기러기)’를 절의 문장으로 쓰는 것이 허용되어 왔습니다.

현재의 본당・거처와 부엌・산문은, 1860년(에도시대 만엔 원년)에 사나다 가문의 원조로 재건된 것으로, 1888년(메이지 21년)의 대화재를 면하였기에 에도기 영주 사원의 격식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